분명 변했다.

그리고 시그널도 있다.
작년 같으면, 아니 ‘11월 12일’에 민중총궐기를 하겠다고 발표했던 올해 추석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도 청와대 가까이에서 집회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 못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광화문 사거리 차벽에 막혀서 어떻게 하면 차를 끌어낼 수 있을까, ‘으쌰 으쌰’하며 끝났을 것이다.
경찰은 ‘양심이 있었을테니’ 물대포는 쏘지 않았을거다.
그래도 ‘최루액’은 사용했을지 모른다.

아니, 10월 24일 JTBC ‘태블릿PC’ 보도가 없었다면 끝내 고 백남기 농민 시신 압수수색 영장 집행을 강제로라도 진행했을지 모른다.

그런 경찰이 분명 변했다.

10월 29일
1300m 세종대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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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청계광장에서 시작했던 첫 범국민행동 촛불집회 이후 경찰은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법원의 판단 하에 물러난 것이지만 작년 이 시기에 이어졌던 민중총궐기 집회를 생각해보면 큰 변화다.

특히 10월 29일에 광화문 사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물러나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거다. 청계광장에서 시작한 행진이 안국동 방면으로 향할 것 처럼 하다가 곧장 종로를 지나 광화문 사거리로 향했다. 경찰은 우왕좌왕하다가 일단 막아섰다. 하지만 그 작전은 완전 실패다.

종로 쪽에서 넘어오던 행진 대열과 그저 종로 방향으로 지나가려던 시민들 사이에 ‘낑겼다’.
과거와 똑같이 (아니 셀카봉은 확실히 발전했지만) 채증조는 채증하기 바빴고, 길을 막기 바빴다.
경찰 앞에 있던 행진 대열은 ‘경찰은 물러나라’를 외쳤다. 반대로 경찰 뒤에 있던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경찰은 물러나라’를 외쳤다.
누가봐도 경찰이 그냥 막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런 경찰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것도 우물쭈물 뺀다기 보다는 확 뺐다.
그만큼 행진 대열은 광화문 양쪽 거리를 가득 채우며 밀고 올라갔다. 마치 청와대까지 가능할 것처럼.

하지만 경찰은 나름의 저지선을 구축했다. 한쪽으론 세종문화회관, 반대쪽으론 미국대사관 앞, 중앙으론 세종대왕상을 기준으로 삼았을까.
나름의 저지선이었겠지만 느낌은 달랐다. 광화문 사거리부터 무조건 차벽 치고, 물대포 대기하고, 최루액 쏘던 그런 경찰이 달라졌다.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르르 물러났다. ‘박근혜를 퇴진하라’는 외침은 이전과는 달리 훨씬 청와대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민들의 승리 정도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건 분명 경찰이 보여주는 ‘액션’이었다.
또 마치 청와대를 향한 경찰의 ‘시그널’ 같았다.
‘지금 해결해라, 빨리 결정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더 물러날 것이다’

또 어쩌면 우리를 향한 ‘시그널’로 들렸다.
‘더 평화롭게 해달라. 더 질서있게 해달라. 그러면 우리는 더 물러날 것이다’

11월 5일
1300m 세종대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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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보낸 ‘시그널’에 시민들은 응답했을까.

11월 5일에는 광화문 사거리를 애초에 막으려 하지 않았다. 세종대왕상을 기준 삼아 집회를 허용했고 일주일 전 청계광장에서 열렸던 집회는 자연스럽게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으로 이동했다. 이명박근혜 정부 내내 집회를 하는 시민들의 일종의 ‘목적지’, ‘목표지점’이나 다름 없었던 광화문 광장은
이제 ‘시작점’이 되었다.

이 날은 ‘영장 집행’ 문제로 긴 시간을 장례식장에서 보냈던 고 백남기 농민의 영결식도 예정됐었다. 언론은 이를 이유로 ‘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도 보도했다.
그래서 경찰은 더더욱 ‘긴장을 탔’고, 대낮부터 경찰버스는 광화문 인근을 가득 채웠다.
낮부터 광화문을 택시를 통해 찾았던 내 눈에는 광화문 사거리를 떠나 저 멀리 서대문 인근부터 사이 사이 길에 가득 차 있는 경찰버스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긴장 그 자체’였다.

경찰은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저지선을 구축했다. 차벽도 만들었고 폴리스라인도 설치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야광점퍼의 경찰들은 야금야금 차벽과 폴리스라인 쪽으로 다가와 대기했다. 아마 작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언론이 보도했던 ‘큰 충돌’을 생각했을수도 있다. 방패도 들고 오고 ‘채증장비’도 갖고 왔다. 역사박물관 옆 ‘시민열린마당’으로 불리는 공원에는 경찰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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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집회는 평화롭게 질서있게 진행됐다. 경찰이 생각했던 시간을 훨씬 넘을 때까지 집회는 이어졌다. 행진 예정 시간에 맞춰 야금야금 나타나 자리를 지키던 경찰들은 어느새 힘이 빠졌는지 자리에 앉기도 하고 ‘끼니’로 보이는 먹거리를 주고 받았다.
뭔가 긴장한듯 앉았던 원래 모습은 그냥 흐트러지기도 했다. ‘경찰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냥 막 흐트러진 채 있었다.

한 동안 잔뜩 긴장한 듯 보였던 경찰의 모습에 비해 시민들은 질서있고 평화롭게 집회를 마쳤다. 행진도 청와대를 향해 나가기보다 애초 계획대로 종로, 을지로 등을 돌아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오고 마무리 지었다.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물론 집회 이후 세종대왕상 인근에서 ‘으쌰으쌰’하던 사람들은 있었다.)

경찰버스, 폴리스라인, 차벽, 방패와 헬맷, 채증장비.
경찰은 ‘허탈함’ 그 자체를 가지고 돌아갔을 것 같다. 아마 복귀하기 위해 장비를 짐칸에 싣고 경찰버스를 빼내는 것이 더 힘든 일이지 않았을까.

11월 12일
900m 내자동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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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응답에 경찰은 반응했고 법원도 ‘허용’으로 응답했다.

11월 12일. 훨씬 전부터 계획한 민중총궐기 집회를 갖기로 한 날이다. ‘충돌 우려’는 이번에도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이미 ‘100만은 충분하다’는 것이 확실시 됐다. 전국에서 노동자, 농민이 집결했고 일반 시민들도 전세버스가 동날 정도로 모여들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부터 광화문까지 사람이 가득찼고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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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사전대회를 여는 것 그 자체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정말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이 보였다. 가족끼리, 연인끼리도 모였다. 평소 이 사람들이 ‘하야’와 ‘퇴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이 ‘퇴진하라’를 목청껏 소리치며 피켓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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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예고된 이승환 공연이 100만이 넘는 시민들을 위로했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광화문을 뜨겁게 만들었다.

본 대회 종료 후 시민들의 행진은 시작했다. 법원이 공식적으로 허용해 준 내자동 로터리, 그러니까 경복궁역 앞까지 시민들은 행진했다. 경찰의 저지선은 내자동 로터리에서 청와대 방면을 막는 것에 집중했다. 시민들의 행진을 방해하거나 강제 진압이나 해산은 없었다. 시민들의 행진은 질서있게 진행됐다. ‘으쌰으쌰’는 있었지만 ‘폭력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100만이 모였던 광장은 평화로웠다. ‘시그널’은 여전히 유효했다.

11월 19일
500m 정부청사 창성동 별관

서촌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촌은 기본적으로 경찰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중국인 관광객이 아니라면 지나가는 모든 시민은 신분증을 보여주며 가방을 열어야 했다. 노란팔찌, 아니 노란색으로 보이는 뭐라도 갖고 있으면 때때로 경찰이 둘러싸고 이동을 막는 곳이었다.
그런 서촌이 열렸다. 정부청사 창성동 별관까지 허용됐다.

지난 12일에 비해 이번엔 전국에 흩어져서 집회를 열기로 한 날이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게 올 것으로 예측이 됐다. 물론 예측은 예측일 뿐, 사람들은 많이 모였다. 경찰버스는 광화문을 지키되 시민의 행진을 방해하거나 진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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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주변을 따라 주차된 경찰버스엔 시민들이 꽃으로 된 스티커를 붙였다.

경찰과 마주한 상황에서도 시민은 경찰을 응원했고 위로했다. ‘너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며. 욕설을 하거나 방패를 손으로 때리는 시민이 있으면 주변 시민들이 말렸다. ‘하지마세요’ 그 한 마디에 문제될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청와대에 들리도록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 뒤 해산했다.
‘질서있게, 평화롭게’ 끝났다. 전국적으로 95만 명이 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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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엔 횃불이 피어올랐다.

11월 26일
200m 청운효자동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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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효자동주민센터.
2014년 5월 8일 어버이날. 세월호 유가족들은 여의도 KBS를 찾아가 김시곤 국장에 대해 항의한 후 이곳 청운효자동주민센터로 와 밤을 샜다. 오로지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이유 단 하나였지만 경찰은 막았다.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어 놓은 채 밤을 새게 만들었다. 연좌농성을 계속 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었다.
‘KBS에서 처리하지 못해서 청와대까지 오게했느냐’며 대통령이, 아니 최순실이, 말했을까. 길환영 사장이 이 곳으로 와 사과를 했고 유가족들은 안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들은 늘 이 곳까지만 가능했다.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가지 못하고 늘 이 곳에서 막혔다.
청와대까지 겨우 200m인데 움직이지 못하고 막히고, 고립되고, ‘조롱받았던’ 그 곳이다.

11월 26일 5차 집회에는 바로 이 곳, 청운효자동주민센터까지 집회가 허용됐다.
지난주 전국에 흩어져서 집회가 있었다면 이번엔 다시 서울 광화문에 집중됐다. 본 무대는 지금까지와 달리 보다 더 광화문 쪽으로 붙었다.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또 주변 도로로 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경찰이 더 물러났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경찰은 사실상 광화문광장 전부를 허용했다.
그동안 경찰버스가 사이사이 막기 위해 알박기를 하고 있었다면 정부청사와 미국대사관을 제외하면 광화문 광장 인근엔 경찰버스가 없었다. (단, 그 자리를 방송사 차량들이 차지했다는 점은 불편함을 주고 있긴 했다. JTBC가 아니라면 쫓겨날 각오를 해야되는데도 말이다.)

서촌을 보다 더 깊숙히 들어간 시민들은 서촌 상인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상인들은 시민들을 향해 물을 전해주고 응원을 보냈다. 경찰의 검문 없이, 가방을 열어주지 않아도 서촌을 이만큼이나 들어갈 수 있었다. 언제였을까. 이렇게 자유롭게 서촌을 누빌 수 있었던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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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린 이 날은 날씨 때문에라도 사람이 모이지 않을거라는 예상과 달리 눈이 그친 저녁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늘었다. 대체 어디에 이렇게 숨어있다가 나왔나 싶을 정도로 서대문 방면에서, 종로 방면에서, 서울역 방면에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보다 더 많은 영상 스크린이 멀리 있는 시민들에게도 본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설치됐다.

보다 가까워진 무대에서 청와대를 향해 ‘너는 듣고 있느’냐 노래했다.
안치환은 ‘하야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양희은은 조용히 등장해 ‘끝애 이기리라’며 위로했다.

전국적으로 190만이 모인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따뜻한 위로를 받은 시민들은 집회가 끝나고 주변 카페를 들려 몸을 녹이고, 식당을 찾고, 노래를 부르며 아직 차량 통행이 허용되지 않은 도로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12월 3일
100m 효자치안센터 앞 (분수대 인근)

사실상 시민의 승리다.
중국 관광객들은 청와대를 배경으로 우르르 모여들어 사진을 찍고 떠들어 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그렇지만 우리 시민이 그저 ‘지나가기만’하려고 해도 검문이 여러 차례 이뤄지던 바로 그 곳이다.
청와대 앞 분수대.

대학생들이 짧게 피켓 하나만 들려고 해도, 그저 소리 한번 지르려고 해도 죄인 취급 받으며 끌려나가던 그 곳.
한 달 보름 동안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을 하던 몸을 이끌고, 지팡이 짚고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찾아간 한 사람을 수십 명의 경찰이 둘러쌌던 그 곳.
바로 그곳까지 집회가 허용됐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앞선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서 겨우 100m를 이동하기 위해 2년 8개월 여 시간이 흘렀다.  변화에 대한 기대를 느꼈을까.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가지고 있던 국화를 저 너머로 던졌다.

대통령의 말 같지도 않은 담화와 새누리당 비박계의 ‘회군’, 그리고 끝내 성사되지 못한 ‘2일 탄핵’에 대한 항의였을까. 광화문에만 190만 명, 전국 232만 명이 모였다. 대통령은 즉각 퇴진해야 되고,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국민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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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무대는 평소와 달리 일찍 마무리됐다.
7시 소등과 한영애의 ‘조율’로 한 껏 고조된 분위기는 일찍 행진을 시작해 청와대 앞 분수대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본 대회 종료 후 일찍 돌아가던 일부 시민들은 행진에 참여했다. 청와대 앞까지 갈 수 있다는 기대였을까.

416개의 횃불을 앞세운 행진 대열은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2부 집회를 가졌다.  청와대 제일 가까운 곳에서 ‘촛불’과 ‘횃불’을 들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외쳤다.

듣고는 있었을까, 아니면 또 TV 보며 ‘보약’인 잠을 청했을까.

9년 만에, 그리고 국민의 뜻

모두 여섯 차례 집회가 이어지면서 경찰은 점점 청와대에 가깝게 물러났다.
서촌 한 가운데에 있는 통인시장 상인들은 ‘9년 만’이라며 칼국수와 물, 음료를 제공했다.
12일 총궐기 집회 때부터 본 무대에는 관심이 없고 가능한 한 최전선으로 뛰어들었던 학교 선배는 이 ‘9년’이 이명박근혜 9년을 뜻하는거라고 이야기했고,
한 언론은 이 상인이 그저 9년 전에 처음 장사를 시작했고 말 그대로 ‘9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시위대 행렬이라고 했다.
어쨌든 ‘9년’만에 처음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뜻대로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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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점점 물러나며 청와대를 향해, 그리고 시민들을 향해 ‘시그널’을 보낸 경찰이라면,
12월 9일  탄핵안이 가결 돼 대통령의 직무가 중단됐으니,

12월 10일 일곱번 째 집회에는
더이상 물러나지 말고 뒤로 돌아 국민을 등에 업고
청와대를 향해 함께 하자.

국민을 보호할 땐 더이상 물러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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